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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역사를 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 즉 픽션이다. 당연히 드라마속 인물인 소이나 조선제일검 무휼 등은 실제 역사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또한 뿌리깊은 나무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들도 역사적인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분명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법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은 드라마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어디까지가 허굴일까?"라는 의문이 말이다. 이때부터 조선왕조실록 부터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리고 아래와 같은 몇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왕 태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태종 이방원은 조선개국공신의 한명이면서 조선초기 강력한 왕권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다. 육조체계를 만들어 왕의 직속으로 두고 사실상 사병제도를 폐지하여 군사력이 중앙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척인 민씨 일가, 정도전,  세종의 장인인 심온 역시 처결 하는 등 외척세력과 일부 인물들이 권력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사전에 없애 버린다. 세종이 즉위하고 나서도 군사권은 태종이 가지고 있었으며, 중요한 정사에도 직접 관여를 했다.  

실제로 효심이 강했던 세종은 아버지의 말을 쉽게 거스리지 못했고 정사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어느정도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송준기가 분한 어린시절의 세종이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의 카리스마에 눌려 아무것도 못하는 왕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종이 드마에서처럼 아버지의 그늘에 가린 허수아비 역할에 그쳤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의 혜택을 많이 받은 왕이다. 그가 태평치세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로 왕권이 약했던 조선개국 초기, 사전에 권력에 개입 될 수 있는 요지를 제거해 버린 태종의 역할을 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의 신하들

뿌리깊은 나무를 보다보면 신하들 중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은 조말생이다. 드라마 초기 태종의 최측근으로 등장하는 조말생은 세종이 집권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 역사에도 그는 태종시절 장원급제하여 후에 병권을 관장하는 병조판서의 자리에 까지에 오르는 인물로서 뇌물사건에 연루 되기까지 세종을 모셨던 인물이다.

또 한명 눈에 띄는 인물을 꼽으라면 허허실실 영의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황희다. 그는 뿌리깊은 나무에서 조정신려와 임금 사이를 알게 모르게 조율하면서 임금인 세종을 보필하고 있는 인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척 하면서도 전체의 흐름을 간파하고 있는 숨은 정치 고수. 그는 알게 모르게 세종을 돕는다.  

우리는 위 두 인물을 통해 당시 상황과 세종의 인재 사랑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세종이 집권하던 초기에는 인재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태종이 새로운 사람을 발탁해 쓰라는 이야기를 남겼음에도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태종의 사람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쓴 것도 그런 이유이다. 하지만, 단지 세종이 여기서 멈춘 것은 아니었다. 바로 박연의 조언을 듣고 집현전을 만들어 인재양성을 병행 한 것이다.

황희는 양년대군의 폐위와 세종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다 귀양까지 가는 인물이다. 세종 시대에 다시 복직을 했으나 큰 힘이 없는 의정부 좌찬감 자리에 배치 받는다. 효심이 강했던 세종이 아버지의 유언을 거스르지 못해 복직 시키기는 했으나,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 했던 인물을 요직에 배치하기에는  무리라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희는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훌륭히 일을 처리하면서 세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결국, 세종은 과거사가 어떻든, 능력이 있다면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 했음을 살짝 유추 해 볼 수 있다. 

최만리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옥에 갇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20회를 보면 밀본 수사의 전권을 위임받은 조말생이 궁녀 소이, 강채윤 할 것 없이 세종과 가까운 인물들을 옥에 가둬 버린다. 여기에는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부제학 최만리를 위시한 집현전 학사들도 포함이 된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 되어 있을까?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최만리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옥에 갇히고 다음 날 풀려난 기록이 있다. 드라마에서는 이 장면을 교묘하게 각색하여 궁녀들을 외부로 내보내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한다.

석보상절이 훈민정음으로 쓴 첫 언문?

가리온은 세종이 훈민정음으로 내놓은 첫번째 언문(번역된 책)이 성리학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쓴 석보상절인 것을 알고 분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책이 언제 간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수양대군의『석보상절 서(序)』가 세종 29년(1447)으로 되어있고, 또 9권의 표지의 기록으로 세종 29년(1447)에서 세종 31년(1449)사이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석보상절』이 발견된 것은 현재 마지막 권이 24권으로 30권에 가까운 방대한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이상의 것밖에는 발견된 것이 없으므로, 그 초간과 복간은 물론 문헌의 내용 자체만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한글로 번역한 것이라서 당시 쓰던 국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보상절이 훈민정음이 반포된 해에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첫번째 책은 아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성리학의 일부 책들이 언문으로 만들어졌고, 한글로 지어진 용비어천가가 1445년에 만들어진 것을 보면 말이다.

석보상절 말고도 많은 불교 관련 서적들이 언문으로 전파 된 것을 두고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건드리지 않고 쉽게 전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훈민정음 반포 이듬해 언문이 과거에 포함 된 것을 보면 사대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보기도 힘든 면이 있다. 어쩌면, 조선이 성리학을 택하기는 했지만 당시 사회에는 고려시대의 숭불사상이 서민들 사이에는 여전히 뿌리 깊이 남아 있어 불교 관련 서적이 수요가 많았거나 퍼트리기에 더 적절 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

세종은 독실한 불교도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궁내에 내불상을 짓다가 유생들과 사대부들의 반대에 직면했다는 것은 역사에도 드러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첫번째 책으로 석보상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제법 그럴듯 하게 들린다.

사진 출처 - SBS TV 캡쳐, 문화재청